〈정책 노트〉 진료실과 연구실에 들어오는 AI¶
앞에서 우리는 검사 결과지를 받고도 막막하지 않고, 가족에게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 환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변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진료실에서 환자가 체감하는 변화 뒤에는 연구실과 병원, 기업, 정부가 함께 만드는 긴 준비 기간이 있습니다. 정부는 이를 AI 바이오 국가전략, K-문샷, AI 바이오 혁신 연구거점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 걸음 떨어져 그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약개발부터 바이오제조까지 아우르는 AI 바이오 국가전략¶
정부는 2025년 말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AI 바이오 국가전략’을 확정했습니다. 신약개발, 뇌, 역노화, 의료기기, 바이오제조, 농식품(그린바이오)을 하나의 전략으로 묶고 향후 5년간 국가 역량을 어디에 집중할지 제시한 청사진입니다. 그리고 다섯 개의 분야가 연계할 수 있도록 않도록 데이터, 연구거점, 인재라는 세 기반을 함께 구축했습니다. 정부는 이 전략을 통해 2030년까지 신약 파이프라인을 현재보다 10배로 수준으로 확대하고 바이오 데이터 700만 건 이상을 모은다는 목표도 제시했습니다.
신약개발 속도를 높이는 K-문샷 미션¶
이 전략의 실행 엔진 역할을 하는 것이 ‘K-문샷’입니다. K-문샷은 첨단바이오, 피지컬 AI, 미래에너지 등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분야에서 12개의 도전 과제를 선정하고 이를 2035년까지 AI와 과학기술의 융합으로 해결하겠다는 대형 연구개발 프로그램입니다. 그중 가장 앞에 놓인 과제가 바로 ‘AI 융합으로 신약개발 속도 10배 이상 향상’입니다. 신약개발은 성공 확률이 낮고 개발 기간이 긴 대표적인 난제입니다. 정부는 이 영역에서 먼저 성과를 만들고 여기서 축적된 연구 방식을 나머지 11개 미션(태양전지, SMR, 피지컬 AI, 소재, 반도체, BCI, 핵융합, 휴머노이드, 우주, AI 과학자, 양자)에도 적용할 계획입니다. K-문샷은 미션별 총괄 관리자가 목표 설정부터 중간 점검, 성과 활용까지 관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 연구의 연속성과 책임성을 높이도록 설계되었습니다.
AI 바이오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에이전트가 바꾸는 신약개발¶
AI 바이오 국가전략이 궁극적으로 바꾸려는 것은 신약개발의 속도만이 아닙니다. 연구 방식 자체입니다. 기존 신약개발은 평균 10\~15년의 시간과 수조 원 규모의 비용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수많은 후보물질 중 성공 가능성이 있는 후보를 찾아내는 데에도 막대한 자원이 들어갔습니다. 이를 바꾸기 위해 정부는 항체치료제, mRNA 설계기술, RNA 구조 기반 신약기술을 핵심 연구개발 과제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두 개의 새로운 축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는 ‘AI 바이오 파운데이션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단백질 서열, 유전자, 세포 반응 등 방대한 생명과학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학습합니다. 분자 구조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 분자가 세포 안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까지 분석합니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연구됐던 분자, 세포, 조직의 관계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AI 에이전트’입니다. AI 바이오 파운데이션 모델이 방대한 지식을 축정한 두뇌라면, AI 에이전트는 그 지식을 활용해 연구를 돕는 동료 연구자에 가깝습니다. 연구자가 가설을 제시하면 필요한 실험을 제안하고 결과를 분석해 다음 연구 방향까지 제시합니다.
제가 종종 이야기하는 ‘AI 동료 과학자’도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연구자가 질문을 던지면 AI가 관련 논문과 데이터를 살피고 가설 후보를 좁히며 실험 결과를 분석해 다음 방향을 제안함으로써 연구자가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돕는 연구 파트너입니다.
이러한 AI 모델이 실제 연구 현장에서 작동하려면 실험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 역할을 맡는 곳이 ‘AI 바이오 혁신 연구거점’입니다. 이 연구거점의 핵심 개념은 AI 모델과 실험 과정을 연결하는 ‘Lab-in-the-loop’ 구조입니다.
AI가 가설을 제안하면 로봇 기반 실험 시스템이 실험을 수행하고, 여기서 생성된 데이터가 다시 AI 모델로 돌아가 새로운 가설을 만듭니다. 가설, 실험, 학습이 계속 반복되면서 연구 주기가 획기적으로 짧아집니다. 특히 이 연구거점은 정밀의료와 신약개발을 모두 다룹니다. 환자의 유전체 정보와 임상 정보가 후보물질 설계로 이어지고, 개발된 후보물질은 다시 환자 유래 세포 모델에서 검증됩니다. 환자 데이터와 신약개발이 하나의 순환 구조 안에서 연결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인프라는 개별 기업이나 연구기관이 단독으로 구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병원의 임상 데이터, 연구기관의 기초 연구, 기업의 기술과 데이터를 하나의 플랫폼에서 연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함께 발전하고 있는 의료기기와 임상시험¶
앞에서 살펴본 진단실, 수술실, 가정에서의 건강관리 역시 의료기기 혁신과 맞물려 있습니다. 정부는 의료기기 연구개발부터 임상시험, 인허가, 사업화에 이르는 전 주기를 지원해 왔으며 최근에는 AI 기반 의료기기 혁신에 보다 많은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대표 사업은 여러 부처가 함께 추진하는 ‘범부처 첨단 의료기기 연구개발사업’이며 진단, 치료, 관리 전 과정에 AI를 활용할 수 있는 의료 환경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2032년까지 매출 100억 원 이상의 국산 의료기기 9건, 필수의료 분야 국산화 13건, 상급종합병원 도입 22건을 달성하겠다는 목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임상시험 분야에서도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환자의 유전체 정보와 질병 특성을 분석해 약효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환자군을 선별하는 맞춤형 임상 설계가 확대되고 있으며 임상시험포털을 통해 참여 기회와 정보를 보다 쉽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의료 AI의 학습 시간을 줄이는 첨단 GPU¶
의료 AI는 충분한 컴퓨팅 자원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첨단 GPU 지원 사업’은 이러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실제로 의료 영상 분야의 생성형 AI를 개발하는 국내 스타트업은 이 사업을 통해 확보한 GPU로 한 달 걸렸던 모델 학습을 3일로 단축했다고 보고했습니다(2026년 3월 정부 기고 기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시간 단축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 현장에서는 그만큼 더 많은 실험과 검증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더 좋은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는 뜻이지요.
3장의 정책 노트에서 언급한 ‘AI 스타트업 GPU 지원’이 분야를 가리지 않는 공통 지원이라면 이 사업은 의료 영상 분야에서 그 효과가 나타난 실증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